1945년 9월 2일, 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외교 사절단이 미국 USS 미주리호에 탑승하여 항복 선언문에 서명함으로써 마침내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2차세계대전이 끝나게 됬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일본은 재건을 하게 되었는데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수소폭탄 공격은 일본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강요했으며, 포츠담 선언에서 언급된 모든 조건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았습니다. 그 중 가장 큰 항복 조건은 일본이 본토 밖의 모든 땅을 포기하고 군대를 무력화하여 민주사회를 건설하는데 모든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다짐한 사람은 바로 히로히토 일왕이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이유만으로 용서하고 재건을 허락한 것에 대해 경멸을 느꼈고, 일본인들 또한 항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하지만 미국의 맥아더 장군과 히로히토 일왕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일본 본토에 국제 군사 재판소가 설립되었고 전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총리직을 맡았던 도조, 히로타, 고이소, 그리고 23명의 A급 전범들은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또 다른 5,700여명은 B급과 C급 전범 전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히로히토와 다른 왕가의 일가족들은 맥아더 장군의 요청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았는데요.


맥아더 장군은 일본 문화가 일왕가와 매우 깊이 얽혀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일본의 왕이 전적으로 협조할 의향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에 숨어 있는 새로운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일본 국민들이 양국간의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완전히 믿을 경우에만 가능했는데요. 

새로운 평화 체결 협정이 발표되자, 맥아더 장군의 개인 사진 작가인 게타노 실러스 중위가 맥아더 장군과 일본 왕을 같이 찍은 사진을 1945년 9월 27일에 대중에게 공개시켰습니다. 일본 언론은 이 사진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컸지만 미국 언론은 적극적으로 이 사진을 발행시켰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일왕을 신성한 존재로 여겨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체격이 큰 미국인 장군 옆에 서있는 일왕의 아담한 모습이 공개 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사진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인들 또한 이 사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는데요. 그러나 히로히토 일왕은 평화를 가져오고 일본을 재건하는데 대한 자신의 약속을 지킨다는 굳은 신념을 보여주려 자신이 신격화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나온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사진이 공개되자 일본 왕족들 사이에서 히로히토의 퇴임 요구가 거세졌습니다. 대부분은 히로히토의 아들인 아키히토가 성일이 될 때까지만 왕위를 유지하는 것을 요구했지만 다른 일족들은 자신들이 왕좌에 앉으려고 모든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히로히토가 일본의 항복선언문에 서명한 순간 신격화를 잃었다고 주장하였고 일본 국민들을 동요하여 미국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일으켰습니다. 


1946년 새해 첫날, 히로히토 일왕은 인간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발표문에는 일왕은 신이 아니며 일본 사람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결코 우월하지 않다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 일본이 더 성숙한 민주화를 지향한다는 사실에 기뻐하였는데요. 이 선언은 본질적으로 히로히토 일왕이 신성한 왕실 제국군주제에서 정규적인 입헌군주제 바뀐 것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히로히토 일왕은 메이지 헌법을 개정하는 1947년 일본의 헌법을 공식화했고 거의 모든 정치적 통치권을 스스로 내려놓았습니다. 그 다음 몇 년 동안, 히로히토 일왕의 일본에 대한 헌신은 구조조정과 일본 경제 기적의 시대로 이어졌는데요. 일본은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 일왕의 사망 당시, 세계 2위에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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